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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포로와 귀환, 포로귀환후 활동한 선지자
공봉권 2014-08-30 추천 0 댓글 0 조회 2327

바벨론 포로와 귀환

 

바벨론 포로는 3차에 걸쳐서 끌려가게 된다.

1(주전 605)/ 이스라엘 일부 백성들(다니엘과 세친구 포함) , 25:12, 29:10)

2(주전 597)/ 유다왕 여호야김이 죽게됨

3(주전 586)/ 시드기야왕이 두눈이 뽑힌채 백성과 함께 잡혀감

 

바벨론 포로를 수용소나 감금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바벨론 포로는 일종의 재정착 프로그램이다. 이스라엘 포로들은 바벨론의 낮은 계급의 자유인과 같은 생활을 했다. 포로기간 동안 유대인 포로들은 자신의 집과 곡식을 재배할 수 있는 땅을 가졌다(29:4-7, 8:1, 12:1-7).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도 3차에 걸쳐서 이루어지게 된다.

1(주전 538,7)/ 스룹바벨이 중심이 되어 49,897명이 귀환/ 바사왕 고레스에 의해

- 하나님의 단을 만들고 제사제도 회복(3:2-3), 율법의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킴, 성전 재건을 시작했으나(3;7-13) 여러 반대로 다리오 2년까지 성전 재건을 하지 못함, 그 후 다리오 왕 2년에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 가운데 다리오 왕 6년에 성전 재건을 완성하게 됨(5:1, 6:13-15)

2(주전 457)/ 에스라의 인도하여 1754명이 귀환

3(주전 444)/ 느헤미야에 의해 귀환/ 아닥사스다왕에 의해

 

 

바벨론 포로귀환 후에 활동한 선지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귀환 후에 활동하던 선지자들로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를 들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선지자는 학개입니다. 학개서의 저자인 그의 이름은 '축제'란 뜻입니다. 그는 스가랴와 동시대 인물이며, 그들이 함께 사역하여 성전 재건을 독려하였습니다. 학개의 개인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B.C. 537년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그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팔레스틴으로 귀환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학개가 선포한 네 예언의 서두에는 각각 공식적인 날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리오 왕 2년은 B.C. 520년에 해당됩니다. 다리오 I세는 제국 내의 종교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의 재위 제2년에(B.C. 520) 학개와 스가랴도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개는 공사의 지연이 대적자들보다는 유대인 스스로의 태만과 직무유기 때문임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성전 재건 노력을 유브라데 강 서쪽 지역의 총독과 관리들이 방해했을 때, 다리오 I세는 전폭적으로 유대 인을 지지했으며 이로 인해 B.C. 516년에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학개와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 스가랴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유브라데 강서쪽 지역의 통치자였던 닷드내가 다리오 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었습니다. 그러나 B.C. 521년 다리오 왕이 페르시아의 왕위에 오르고, 그 다리오 왕이 고레스의 조서를 그대로 승인하여 공사가 다시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 인들의 마음은 변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재건이 자꾸 방해를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일에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백성들의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고치고, 그들의 무관심을 깨우치려고 노력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14년이나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에 다시 착수하기 위해 다시 백성들을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이 일을 지도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성전 재건에 호응하게 되었고, 결국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다 인들은 부푼 꿈을 안고 포로에서 귀환하였고,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바벨론이 무너뜨린 그 성전의 영광에 비길 수는 없었지만, 장차 더 큰 영광이 임하리라는 예언으로 감동받아 지어진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도 임하리라던 그 큰 영광이 나타나지 않자, 유대인들의 소망과 기대는 희미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이 약속했던 그 번영이 돌아오기는 커녕, 하루하루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기근과 흉작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로운 통치에 회의와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자를 선하다고까지 말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하나님 앞에 슬프게 행하는 것도 무익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나의 사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성전 재건이 끝난 후에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회의와 의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잘 모르는 까닭에 비롯되는 것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이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재난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격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고, 성전 의무를 불경스럽고 형식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흠 있는 것들만 골라서 드림으로써, 백성들까지도 그릇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한편, 백성들은 젊어서 맞은 아내를 버리고 이방 여인과 결혼하였습다. 이처럼, 당시에는 마술·간음·부정·약자를 압제하는 일·불경건 등 모든 종류의 죄가 편만해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모두 지적하고, 그들이 돌이켜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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